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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가족
작성자: 송의덕   |   작성일: 2018.03.09   |   조회: 1355

작년 이맘때쯤 나는 대학 입시 때문에 이리 저리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자리에서 한동의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이 글을 쓰게 될 줄이야.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생각만 해도 파노라마처럼 간증거리가 쏟아진다. 사실 한동대학교에 들어 온 학생이라면 그 누구에게 간증이 없겠는가. 모든 이들에게 다 각자만의 갈대상자가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본다. 그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다 뿐이려니.

 

나는 아제르바이잔 선교사 자녀이다. 부모님께서는 1992년 처음 파송을 받으시고 아제르바이잔에 발을 내디디셨다. 소련으로부터 독립 한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곳에서는 러시아의 잔해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많은 나라에 노출 되지 않았던 터라 그 곳에는 한국사람은커녕 다른 외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었다. 그런 동떨어진 상황 속에서 부모님께서는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 후 둘째인 우리 언니가 아제르바이잔의 열악한 병원 시설에서 태어났다. 그 둘째인 언니를 곧장 따라 1년 만에 막내 딸인 나도 태어났다.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현지 유치원에 보내셨다. 현지 유치원 후에는 현지 학교를 보내셨고 11년간 현지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거의 우리 주변에는 현지 친구들이 있었다. 동네에 나가도, 학교에 가도 항상 아제르바이잔 어로 대화하고 놀았다. 그런 우리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는 전교생이 5명이었던 한글학교를 설립하셨고 매주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한국인도 얼마 없었고 우리 또래는 더더욱 몇 명 없었던 시절 우리 삼남매는 더욱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 사실 엄청나게 싸우고 엄청나게 다투며 자라왔다. 그래도 3명이라는 사실이 알게 모르게 든든했던 것 같다. 첫째인 우리 오빠가 중학생이 되던 해 여름 우리 가족은 함께 한국에 가게 되었다. 오빠에게 포항에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국제학교에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고 그 곳에 가게 되었다. 바로 그 곳이 한동대학교 내에 있던 한동국제학교였다. 그 때부터 아마 한동대학교와 우리 가족 간의 인연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항상 티격태격 싸우던 오빠를 한국에 홀로 두고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왔던 그 날. 그 때에는 별 감정이 없었다. 매일매일 싸우던 오빠와 떨어져 지낸다니 뭔가 후련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얼마 되지 않아 인정하긴 싫었지만 나는 우리 오빠가 참 보고싶었다. 가끔 방학 때나 되어야 몇 주정도 함께 있다 가곤 했었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오빠와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언제나 아쉬웠다.

 

어느 덧 6년이 지나 우리 오빠는 혼자 한국에서 지내며 졸업을 하였고 또 입시를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첫 째인 우리 오빠의 입시가 한동대학교로 마무리 되었다. 오빠가 한동대학교를 갈 때까지만 해도 전혀 입시에 개념이 없었다. 내가 그 길을 밟아갈 줄은 생각도 안 했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려니 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2011년 여름. 1살차이 연년생인 언니와 함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에 재학하고 졸업한 나는 언니와 함께 두 손 잡고 입국하였다. 입시를 향해서 말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정말 내가 한동대학교에서 이 삶을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둘이서 나와 아는 교회 목사님 사모님께서 운영하시는 학사관에서 지내며 이리저리 서류를 찾아 돌아다녔고, 밤을 새며 자기소개서와 사투를 벌였고 뭐가 나올 지도 모르는 면접 주제에 머리 터질 듯 고민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어떻게 그런 힘이 났었는지 모르겠다. 아무 결과도 예측 할 수 없었던 길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던.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 날들.

 

처음에 나는 한동대학교에 12년 특례자 전형으로 들어오고 싶었다. 이는 초중고등학교 전 교육과정을 해외에서 이수한 사람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전형이다. 나는 초중고등학교 전 교육과정을 아제르바이잔 현지학교를 다녔다. 그 전에도 아제르바이잔에 있었고 쭉 그 곳에서 살아 왔기에 당연히 지원 자격이 되리라 여겼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국에서 3개월간 재학한 사실이었다. 부모님의 선교훈련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다녔을 뿐인데 이 사실이 지원 자격을 박탈 할 수 있었다.

 

나는 12년 특례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이 전형은 다른 전형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한다. 내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자기소개서를 제출 했어야 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공들여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여러 손을 거쳐 한동대학교에 전달되었다. 그 서류를 한국으로 보내기 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내가 직접 작성하지만 않으면 한국에서의 재학사실을 증명할 서류는 없었다. 이 서류를 제출하기만 해도 합격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발목을 더욱 붙잡았다. 이 사실을 작성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서류를 보내기 1시간 직전까지 했었다. 무수한 고민 끝에 결국 재학사실을 직접 작성하였고 그 아래 작은 쪽지를 써내려갔다. 나의 사정을 고려해달라고 말이다.

 

기대를 품고 귀국한 몇일 후 한동대학교 입학처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 본인이 재학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자격이 안 되니 대신 선교사자녀 전형으로 지원하라고 말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결과였지만 기대가 컸던 터라 상심도 뒤따라오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지만 아직 주어진 또 한 번의 기회에 다시 힘을 쏟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서류를 준비하며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아갔다.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언니와 함께 포항에 직접 내려왔었다. 그 전에도 오빠학교 일로 몇 번 들렀던 적은 있었지만 막상 내가 지원하는 학교라는 사실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제서야 안 사실이지만 서류 제출 시 내는 비용도 지원자격이 안 될 경우에는 환불이 안 된다고 적혀 있었지만 한동대학교는 환불해 주었었다. 그 때 우리 오빠가 나에게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이곳이 한동대학교야."

 

몇 주 후 1차 합격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기 보다는 어느정도 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데 내 안의 교만함에 가려져 있었던 것 같다. 1차 발표 후에 면접을 준비하면서도 내가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교만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면접 당일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이 안 되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정작 대기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험지를 보는 내내 손이 떨리고 있었고, 교수님들과 면접을 하면서도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폭풍 같던 면접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 때 내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재수를 생각하고, 한 없이 낮아졌다. 교만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하나님은 내게 교만함이 있을 때마다 바닥까지 끌어 내려주셨다. 절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말이다.

 

드디어 발표 당일 날 아침 자고 있는데 선교단체 대표님께서 합격 소식을 전화로 전해주셨다. 언니와 나 두 명 모두 합격했다고 축하한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직 잠이 덜 깼구나 생각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합격시켜 주시다니. 이렇게 교만했던 나를 합격시켜 주시다니.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한국으로 대학가길 원치 않으시는 줄로만 알았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있었다. 어디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붙잡는 법을 배우고서야 하나님께서 합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언니와 함께 합격시켜 주심에 큰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로 우리 삼 남매 모두 한동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가끔은 실감이 안 난다. 멀리 떨어져 지내던 오빠를 부르면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항상 든든한 언니도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내가 만약 혼자 다녀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비록 부모님을 주말마다 뵐 수 없고, 방학 때 갈 집이 한국에 없다지만 가장 든든한 오빠, 언니와 함께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항상 이끌어 주심을 기억하니 마음이 벅차오른다.

 

하나님께서 우리 삼 남매를 한동대학교로 불러주셨으니 모든 필요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입시 생각만 해도 한없이 간증이 쏟아지는데 사실 매일 매일이 우리에겐 간증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간증문을 한 타자씩 써 내려가며 다시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하다. 내가 한동대에 들어오며 느꼈던 이 초심을 기억하며 남은 시간들도 누리며 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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