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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시는 하나님 - 한동으로, 천국으로
작성자: 임찬양   |   작성일: 2018.03.09   |   조회: 3560

유년의 뜰
저는 탄생부터 유달랐다고 합니다. 20여일이나 지나 그것도 촉진제를 맞고 태어난 저는 쭈글쭈글한 과숙아의 모습이었습니다. 까다롭고 잠투정이 유난히 심했던 저는 숫기가 너무 없어서 어머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섯 살 때부터 노회에서 개최되는 성경 암송대회에 출전하도록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능이 느리고 답답하든지 성경 한 구절을 외우는데 이틀이 걸렸답니다. 그렇게 외운 성경구절을 남들 앞에서 암송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첫 대회 때는 무대에서 외우기 시작하는 순간에 어머님이 저를 데리고 들어오셨답니다.


"아무래도 아이가 무대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저는 숫기 없고 영리하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그 때 저희 가정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세 살 많은 누나가 정신을 잃고 자주 쓰러지는가 하면 저도 갑자기 기절을 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국립농산물검사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셨는데 우리가 정신을 잃을 때마다 아버지는 집으로 달려와 우리를 병원으로 데려가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큰 병원에 입원하여 갖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병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휠체어도 탈 수 없는 중병환자가 되어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했고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고통이 아버지를 짓눌렀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하나님의 소명을 느끼고 주의 종이 될 테니 살려달라고 가슴 깊은 하소연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서원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살려주셨고 아버지는 공직에 사표를 던지고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늦깎이 신학생이 되셨습니다. 누나는 여덟 살, 저는 다섯 살, 가장이셨던 아버지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전업 주부이었던 어머니는 '어린이 영어공부방'을 개설하여 생계를 맡아나가게 되었습니다. 5년간의 공부를 끝내신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가난과 초라함 속에서 유년은 지나가고 있었지만 매년 실시되는 성경암송대회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9년간 연속하여 성경암송대회를 참석하는 동안에 저는 영리하고 멋있고 잘나가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초등하교 6학년 때는 꼴찌를 하다가 일등을 하는 혁신적인 변화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제가 전국주일학교(장로교 고신) 성경퀴즈 대회에 나가서 당당히 골든 벨을 울린 일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에는 성경 한 장을 두어 번 만 읽어도 암송이 되었고 암송되어진 성경은 몇 달이 지나도 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황의 늪을 지나
하지만 사춘기 때인 중학 시절은 반항과 자유분방함으로 부모님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외모에 신경을 썼으며 여자애들에게도 관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외출을 하면 기획사 사람들이 다가와서 방송 쪽으로 데려가려고 길거리 캐스팅을 하곤 했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밤 열두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이 되어 가난한 것이 너무 싫었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중학교 입학하여 교복을 마련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졸업생이 주고 간 교복을 물려 입기로 했습니다. 그 교복을 어머니가 밤새워 고쳐서 입었습니다. 그 당시에 깔끔하고 멋있는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어쩌다 친구 집에 놀러가 보면 아파트의 부유하고 안락한 모습이 교회당에 칸막이를 하여 방을 내고 살던 제게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학교 급식이나 운영회비를 지원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저는 죽어도 그 일이 싫었습니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체할 것만 같았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야. 우리는 아빠가 공직에 계셨더라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목사님이 되셔서 힘드니까 하나님이 정부를 통하여 공급해주시는 것이니까 당당하게 받아 누려도 되는 거란다."라고 어머니는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친구들 앞에서 그런 자로 낙인 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국 그 혜택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중, 고등학교 6년간을 급식 지원대상자가 되어 감사하게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무슨 장학금을 준다기에 운동장 조회 때 받게 되었는데 그 장학 증서에 '가난한 가운데서도 꿋꿋이..'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구령대에서 저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공직자가 아닌 목사님이 되어 개척교회를 묵묵히 섬기셨고 어머니는 영어 공부방을 운영하시면서 교회의 학생들에게는 무료공부방을 운영하여 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 등을 가르치셨습니다. 누나는 피아노 학원을 잠깐 다닌 것 외에는 학원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성적이 우수했고 모범적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치어리더 단장까지 했습니다. 그런 누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연세대학 치위생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스포츠 신경도 있어서 고1때 반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장 역할을 잘해내어 그 해 저희 반은 학업과 각종 행사에 항상 일등을 하는 신나는 학급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미더워하지 않으셨던 담임선생님도 반장인 저를 많이 칭찬해주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해에 저희 가정은 지독한 가난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국립대학 사범대 출신이었지만 불어를 전공하여 발령을 받지 못한 채 23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민일보사에서 교회에 무료로 신문을 넣어주겠다고 하였는데 그 신문 귀퉁이에 '미발령교사 부전공 연수 실시 후 교직에 발을 내딛다.' 라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석 달 동안 집을 떠나 영어 부전공연수를 하신 후 교원임용고사를 보아 중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난 생 처음으로 저는 수학 단과 학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한사코 말렸지만 저는 마라톤 선수처럼 쉬지 않고 공부만 했습니다. 저의 성적의 그래프는 계속 상승곡선을 그어나갔습니다.


그 즈음에 결혼을 하지 않은 강도사님 한 분이 저희 교회에 들리셨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신학교에 다니신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분을 교회에 기거하도록 도와주고 식당을 정하여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드렸습니다. 빠듯한 미 자립교회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그 분을 섬겼습니다. 2년 정도 교회에서 기거하신 그 분이 "영어의 달인"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입시학원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영어 성경을 몇 백번 통독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영어 비법도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 분이 교회 학생들과 저의 남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누나는 8개월 정도 그 분과 꼼꼼하게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고 저도 영어 개인 교습을 받게 되어 영어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누나는 대학 2학년까지 마친 후에 뉴질랜드에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준비하고 갔더니 연수를 간지 두 달 만에 말이 트였습니다. 그래서 어학연수의 매력을 느끼고 있던 차였습니다.


한편, 고3 9월 모의고사에서는 제가 상상해보지 못한 낮은 성적이 나왔습니다. 그 성적은 그 해 대학 수능 점수를 예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몇 점씩 부족하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못하게 철저히 길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재수를 하느냐, 반수를 하느냐 하는 궁리 끝에 섬광처럼 어학연수를 떠나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부모님도 그것은 잘 되면 세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라고 마음을 모아 주셨습니다. 대학합격과 영어실력과 신앙훈련을 다 얻어온다면 가장 아름다운 재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어학연수를 가는 것이 재수나 반수보다도 경비는 덜 들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미 자립 교회 목회자에게 주어지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감하게 저는 재수 보따리를 들고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꿈에서나 보았음직한 아름다운 풍경들과 믿음의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재수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학코스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수능공부를 했습니다. pmp에 담아갔던 인터넷 강의와 넷북에 담아갔던 수능공부 자료들, 그리고 항공으로, 선박으로 끌고 갔던 문제지들, 그것들을 끌어안고 저는 6개월간 뉴질랜드에서 재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스피킹을 제대로 못했던 제가 두 달 후에 원어민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누나와 저는 틈나는 대로 부모님께 우리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승전보(?)를 알렸고 부모님은 돈은 많이 들었지만 영어 실력이 늘어간다는 소식에 늘 기뻐하셨습니다.



한동으로, 한동으로
그런데 뉴질랜드에서 '한동대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팀?이 잘 되었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님의 향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SKY가 아니면 대학이 아닌 줄 알고 있던 제게 '한동대학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한동대학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한동대학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셨고 신앙은 아무 대학에서도 동아리 활동으로 지켜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의고사 성적을 보고 부모님은 제가 SKY를 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전 이 대학이 아니면 안갑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재수를 하면서 약했던 언어영역의 성적도 많이 향상되었음을 느꼈고 모의고사를 쳐본 결과 거뜬히 합격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믿었습니다.


일단 한동대학교 수시 전형에 응시했습니다. 1차 합격하여 면접시험을 보러 갔는데 뉴질랜드에서 알았던 형, 누나들이 있어서 아주 편안하게 면접을 보았습니다. 2010년에 생긴 한동대학 입학 전형의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도 지금의 저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1. 자연계 입학 정원이 100명에서 110명으로 늘어난 것
2. 입학 사정관제 실시
3. 수시합격생 중에서 후보 합격 제도 실시
4. 추천자 전형에서 담임목사 추천
면접 시사 문제에서, "인터넷 강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였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했고 고3때도 pmp를 두 개나 사서 인터넷 강의를 애용했던 저는 유리한 문제를 받았습니다. 여러모로 합격은 '따 놓은 당상' 이라고 믿었는데 "후보 4번"이라는 믿기지 않은 결과 발표를 확인했습니다. 최종발표일이 다가오자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년에는 등록포기 부분을 정시에서 채웠는데 후보제도가 있어서 4번이 된 것이었고 110명이라 그나마 후보가 된 것이었습니다. 한동대학으로 가는 길은 먼 길이었습니다.


저는 '수만휘' 카페에 들러 검색창에 '한동대학교'를 쳤습니다. 그러자 한동대학에 합격하고 다른 대학교와 동시에 합격하여 상담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글들이 꽤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 모든 이들에게 쪽지를 보내고 메일을 보내어 저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저는 한동대학에 반드시 가야합니다. 혹시 다른 대학으로 결정하신다면 귀찮으시더라도 포기각서를 제출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발표 당일에 피 마르는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카페에서 말씀드렸던 분들이 귀찮은 것을 감수하고 포기각서를 써준 것이었습니다. 최종발표마감 30분전에 학교에 전화를 해보니 세 사람이 포기각서를 제출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며 메일을 확인하는데 아이디명이 "김건"인 분이 메일에 답장이 와있었습니다. 그분의 요지는 후보 4번이면 염려 없을 것이고 자기가 포기각서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전화를 했습니다. 합격생 중에 혹시 '김건'이라는 이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포기 할 의향이 있으니 연락처에 전화를 좀 해서 각서를 써달라고 부탁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마감 15분 전에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분의 손에 저의 원서가 들려있었습니다. 합격되었다고 연락하려던 중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한동대학교 자연계 추천자 전형을 문을 시끄럽게 쾅쾅 닫으며 들어갔습니다. '한동' 이라는 갈대상자에 어린 모세처럼 올라타게 되어 지금 깃발을 휘날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고 한동에 발을 디뎠겠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바닥으로 낮추시고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영민하고 대단한 학우들을 뵐 때마다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입학생 반배치 영어 시험에서는 writing 부문에 만점을 받아 주님의 위로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천국으로, 천국으로
특별히 내 삶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까지 함께 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이끄셨지만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 시간은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그 곳은 한동대학교 일반 공지에도 올라온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Auckland Edinburgh College 인데 이곳에 여러 나라로 부터 오는 학생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선교사의 신분으로 있었고 그 곳의 환경에는 많은 좋은 신앙훈련의 계기가 있었기에 나는 인생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한동대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뉴질랜드로 이끄심을 받았기 때문에 한동대를 알게 된 것도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고 나에게서 고백이 나오는 것이 진정한 간증이고 보물이며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품었던 외국친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열매를 보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곳도 한국이 아닌 그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오직 은혜로 사랑하는 한동대학교에 오게 되었는데 사실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교에서 오히려 이곳이 온실이 아닌 온실속의 세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으며 인간관계와 학업 신앙생활 등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였고 맑은 날 보다 흐린 날이 더 많은 것 같았습니다. 마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상태와 신앙과 믿음이 순환패턴을 형성하기도 하여 괴롭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고 주께서 로마서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고 실재로 내 삶에도 적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것 이었는지 자세히 기술할 수 없으나 내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과 멀어져가거나 감사가 사라질 때 주는 그럴 때마다 주님의 방법으로 나를 터치해주셨고 나의 마음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꿔주시곤 하셨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영적 전쟁이었는데 마귀에게 나의 신앙과 영성들이 다 가식이었다는 정죄를 받아 매우 고통 중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삶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맛이었습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기뻐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틈만 나면 울던 내가 옛날의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이 힘이 되었고 감당할 시험밖에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이제 감당 못하겠다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 순간 나에게 한 번도 문자해보지 않은 친구로부터 문자가 날라 왔는데 그것은 내 상황에 힘이 되는 성경구절만 보낸 것이었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기에 저는 진정으로 그 말씀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어 갑자기 문자를 보낸 이유를 묻지 않고 고맙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고백하기를 나에게 쓰려던 문자가 아닌데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갑자기 머릿속에 스처 지났고 왜 내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당황하고 있었는데 보내라는 확신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작은 사건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찬양아 내가 너 바로 옆에 있다.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 옆에 항상 함께 있었고 다 내려 다 보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주께서 관여하셨던 것이었고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은 주께 쓰임 받기위해 훈련받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와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나를 천국으로 이끄시고 계셨고 그 여정속에 입학전에 많이 기도했던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주께서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더러는 말씀의 은사 있는 친구, 기도의 은사가 있는 친구, 사랑의 은사가 있는 친구, 주일 예배든 다른 예배든 그런 공적예배 회복에 관심 있는 친구 등 다양한 색깔의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는데 정말 힘이 많이 되고 요즈음에는 따로따로 나와만 1:1관계를 맺는 친구들이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 묶이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참 감사함을 느낍니다.


성경도 내안에 계신 성령도 그리고 나를 지금까지 이끄신 삶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어떤 일을 하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만 신경 쓰고 살면 하나님께서 하루 하루 일주일 일주일 한달 한달을 이끌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꼭 유능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겸손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요셉과 다니엘 같은 사람임을 압니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내 나이에도 주님께서 주신 뚜렸한 비젼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고 계십니다. 국내 유일하게 1학년 때 전공을 탐색하고 2학년 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한동대에서 기도로 주님이 내가 무엇을 공부하기 원하시는지 찾고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비젼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것이며 내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이 글에 찬양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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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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