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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사랑하시는 딸 '장평강'
작성자: 장평강   |   작성일: 2018.03.09   |   조회: 1374


I. 세상에 대한 거부감
A. 가면을 쓴 아이

1991년 5월 28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한 번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다. 아버지께서는 전도사님으로 성남에 있는 동부교회를 섬기셨으며 나에게는 전도사님 딸이라는 직위가 부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으며, 나는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했다. 마음과 행동의 부조화는 어느새 내 얼굴에 가면을 씌어 놓았다. 또한 교회에서 보는 아버지와 집에서 보는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고서, 나와 비슷한 모습에 공감하면서도 어느새 원망과 불만이 쌓여갔다.

B. 교회를 창피해하는 소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시골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 곳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셨다. 교회는 굉장히 작았고, 그 안에 있는 작은 두 방이 우리 가족의 집이 되었으며 개척교회라서 우리가족을 빼면 성도들이 3명 남짓했다. 갑작스런 이사와 전학으로 인하여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생겼고, 그동안 친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또 다른 인간관계를 개척해야 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처음 전학을 갔을 때, 친구들은 나에게 "너희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니?"라고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라고 말하고, 우리교회에 초대하였다. 친구들이 우리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한 말은 "너네교회 왜 이렇게 작아?,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없어?"였다. 나도 큰 교회와 성도들이 많은 그런 교회가 좋았지, 이런 초라한 교회는 너무 싫고 창피하였다. 그 뒤로 내가 친구들을 우리교회로 전도하는 일은 없었다.

C. 가난이 싫어!
중학생이 된 뒤, 나는 우리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어려운 교회사정에 어머니께서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셨지만, 계속 카드빚은 늘어나고 결국에는 신용불량자에 파산까지 하게 되셨다. 밤마다 쌀 떨어진 것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한숨이 들려왔으며 종종 금식이라는 명목 하에 밥을 굶어야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전화 요금이 너무 많이 밀려서 다 끊겨버리는 일도 있었다. 또한, 다른 친구들은 생일이라고 부모님께서 용돈도 주시고 그 돈으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했지만, 내 생일에는 그 흔한 케익조차도 살 돈이 없어서, 미역국이 내 생일선물의 전부였다. 친구들이 어디로 놀러가자고 할 때도 돈이 없어서 놀러가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지만, 돈이 없어서 놀러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서 항상 일이 있다고 둘러대었고, 친구들은 그런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자신들과 노는 것을 싫어한다는 오해를 하기도 했었으며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다 보니, 모두가 피상적인 인간관계가 되어갔고 진정한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피부에 와 닿는 가난이라는 무서운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가야만 했던 너무나 힘든 시기였다.


II. 혼자 걷는 길
A. 공부해서 남 주냐?

경기도 광주에 있는 경화여자 고등학교에 부푼 기대를 안고서 입학하게 되었다. 첫 모의고사를 보고나서 엄청난 좌절감에 휩싸였다. 내 자신이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언/수/외/사탐/과탐의 등급은 5/4/6/2/4였으며, 담임선생님께서는 "너가 우리학교에 들어온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학가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그 소리가 너무나 상처로 돌아왔고, 도리어 오기가 생겼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오로지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나가 성공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약 1년간 미친 듯이 나를 위한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가 책상에서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공부만 했다. 처음 1달은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공부했고, 몸이 너무 지쳐서 그 다음부터는 하루에 잠자는 시간 6시간 정도만 빼고 공부를 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았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워서 빨리 뛰어갔다가 왔으며, 공부를 하는데 긴 머리가 방해가 되어서 숏컷을 하는 등. 그렇게 하루 24시간 중 17시간 이상을 공부에만 투자했다. 학기말에 선생님께서 모의고사 성적표를 나눠주시다가 내 성적표를 보시고는 "너가 인간승리다."라고 말씀하셨다. 언/수/외/사탐/과탐의 등급이 1/1/3/2/1이었다. 성적표를 들었을 때 그동안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 감정에 뒤섞인 눈물이 나왔다.

B. 연기하는 소녀
경화여자 고등학교의 연극부는 내가 학교를 다닐 당시 전국청소년 연극제에서 당당히 대상을 탈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있는 동아리였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가지고 계셨고 그러한 부분이 내가 그분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영향으로 나는 연극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2학년이 되던 해에 연극선생님께 부탁을 드려서 연극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어른들께서 내가 연극을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셨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셨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 생각이 전부 옳고, 내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른들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주관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내가 연극부에 들어가면 그 전에 하고 있었던 한음(합창동아리)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고등학교 동아리는 선후배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하였고, 동아리를 나간다는 것은 곧 ‘배신’을 한다는 것이 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나에 대하여 크게 실망을 했고, 내가 가르쳤던(종종 합창부 선생님 대신해서 내가 부원들을 가르쳤었다) 친구들과 후배들이 나에게 책임감이 없다면서 비난해왔으며 특히, 선배들은 나에게 배신자라면서 욕을 엄청 해댔다. 그때당시, 나는 연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비난과 수모를 참아가면서 연극부에 들어갔다. 연극부 사람들은 나에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라는 말을 하면서 (원래 1학년후배가 하기로 했던 배역을 내가 하게 되었기 때문에.)나를 냉대하였다. 심지어 나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였고, 나는 어딜 가나 밉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지지해주었으나,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에게서 등을 돌렸고, 같이 밥 먹을 친구도 없어서 혼자서 밥을 먹거나 아니면 아예 밥을 먹지도 않았었다. 나와 친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나를 비방하고 험담을 하는 무리들로 바뀌었고, 그나마 나를 붙들어주었던 연극에 대한 확신도 흐릿해져 가는 상황에서 내 삶 전체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는 자존심이 너무나 강한 아이였고,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하여 후회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괜찮은 척, 잘하고 있는 척, 그렇게 척!척!척!을 하면서 내 삶 속에서도 연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C. 해뜨기 바로 직전의 어두움
올해 20살, 앞으로 내가 경험하게 될 일들이 정말 많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일들 중 이 시기가 나에게 가장 끔찍하게 힘들었던 시기였다. 나는 고2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시기에 전학을 결심했다. 연극부를 들어간 이후로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경험하였고, 심지어 내 안에 자살의 영이 들어와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이고 가치 없어 보이기 시작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수 십 번씩 하곤 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나를 힘들게 했던 친구들이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겠지? 그리고 평생 그 기억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겠지? 그러면 그게 나의 통쾌한 복수야…’ 이대로 나를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젠가 정말 큰일을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심정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한 사람도 없었고, 나는 여러 가지 진부한 변명들을 붙여대며 전학을 가게 해달라고 선생님과 부모님께 부탁하였다. 갑작스런 나의 전학결심에 모두들 당황하였고, 다들 반대하셨지만 나는 또다시 고집을 부렸다. 전학을 갈 때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었다. "지금은 이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전학을 가서는 더 힘든 상황이 생길 수 도 있다. 지금 너가 하는 행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잠시 피한 것뿐이고, 언젠가 문제는 또다시 발생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문제는 또 다른 유형으로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 전학을 가서 나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평이 나버리는 바람에 많은 편견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외로움을 느꼈으며, 전학을 가서 사귄 남자친구에게서 그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였고, 그 친구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굉장히 깊어졌고, 그런 빠른 관계 발전에 있어서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설상가상. 굉장히 보수주의적이신 부모님께서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불안정해졌고 그러다가 고3 초기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그 남자친구가 내 친구와 다시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무너져 내렸으며,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한동안 밥도 못 먹고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 일이 있고서 얼마 되지 않아서 할아버지께서 풍으로 쓰러지시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게 되셨는데, 아버지께서 장남이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병원비(한 달에 80만원 이상이 들었다.)의 대부분을 우리가족이 부담해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건강문제와 경제적문제로 인하여 부모님께서 굉장히 힘들어 하셨고, 엎친 데 덮친 격 첫째동생이 탈선을 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 때문에 법정문제로 법원을 왔다 갔다 하셔야만 했으며 법원에서 ‘목사 아들이 왜 그러냐.’라는 말을 들으시는 모욕도 겪어 내셔야 했다. 또 동생이 가출을 하게 됨으로써 집안이 거의 파탄이 났다. 나는 이러한 가정문제와 남자친구문제,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인하여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루는 영어 단어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커닝을 하게 된 상황으로 몰리게 되어서 영어 수행평가 점수가 0점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울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울 거면 나가서 쳐 울어!"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학교를 뛰쳐나와서 무작정 버스를 탔고 가출이란 것을 난생 처음 해보았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당신이 살아계시기는 하신건가요. 내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면서 왜 도와주지 않으시는 건대요. 내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요? 당신은 정말 매정하시군요.’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나는 약 세 달 만에 10kg가 빠지고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하였지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III. 내 발자국 옆의 또 다른 발자국
A. 그분의 계획하심

우연찮게 ‘갈대상자’라는 책을 읽게되었다. 3~4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나는 그 책을 저녁 9시정도부터 읽기 시작하여 새벽 4시쯤이 되어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책 중간 중간에는 아직도 내 눈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상에 이런 대학이 있었다니 너무나 놀랍고 감사했으며, 한동대를 통해 알게 된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컸다. 나의 이런 어려운 상황도 주님의 계획하심 안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님께서 나를 크게 쓰시려고 연단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동대’라는 곳을 통해 그날 밤 나의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고,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한동대에 대한 강한 애정이 생겼다. 내가 이런 대학을 정말 우연치 않은 기회로 알게 된 것은 분명한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서 그때부터 한동대학교를 목표로 두고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고1때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했던 것처럼 한동대에 미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점점 떨어지기만 하던 나의 성적표에 변화가 일어났다. 2학년 때 평균 3점대후반을 기록했던 나의 내신 성적은 3학년 때 1점대중반으로 올라섰고, 모의고사 성적도 점점 오르기 시작하였다. 여름 방학 때에는 한동리더십캡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마감 전날 리더십캠프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정에도 없이 참가하게 되었다.)그때 저녁 예배 시간 때 주님이 나의 상한심령을 위로하셨고, 한동대라는 곳에서 큰 감동을 얻게 되었으며,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학이구나.’라고 느끼고 이런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더더욱 한동대가 절실해졌다. 그렇게 한동대만 바라보며 공부를 했고 어느새 수시1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결과는 좌절이었다. 수학, 영어 시험에서는 평소 실력보다도 훨씬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였고, 구술면접에서는 논리적으로 말을 못하고 웅얼거리기만 했으며 심지어 힘들었던 일을 말하는 시간에 감정에 북받쳐 울기만하다가 나온 것이었다. 불합격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었고, 너무나 허탈했다. 정말 너무나도 많이 기대하고 기도하고 준비했던 시험이었는데 그렇게 망치고 나니까 내 삶이 끝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다시 한동대에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험을 망치고 나서, ‘나의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한동대였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 죄송합니다. 한동대. 안가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저를 인도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였다. 경기도에서 혼자 포항까지 와서 다시 혼자서 포항에서부터 경기도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회개기도를 정말 많이 했다. 그리고 다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정말 나약한 인간인지라 주님의 뜻이 한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한동대를 알게 하신 것이 주님이시니 주님께서 저에게 확실한 응답을 해주세요. 만약에 제가 자고 일어났을 때 모르는 사람에게서 저를 위로하는 문자가 와있으면 주님이 한동을 통해 저를 쓰실 것이라고 믿겠고요, 그렇지 않으시다면 주님이 다른 곳을 통해 저를 쓰실 것이라고 믿고서 한동대를 내려놓겠습니다.’ 그러고서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에는 모르는 세명의 사람으로부터 힘내라는 문자가 와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쉽게 믿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도했다. ‘주님 정말 저의 믿음이 겨자씨만도 못합니다. 하지만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한 번 저에게 응답해 주세요. 이번에 제가 자고 일어났을 때 모르는 두 사람에게서 저를 응원하는 문자가 와있으면 그것이 주님이 한동대를 통해 저를 쓰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한숨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정말 정확하게도 두 사람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합격자 발표날, 예상대로 나는 불합격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확실한 약속을 해주셨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고, 주님의 뜻을 의심하려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 마음의 중심이 한동대가 아니라 주님이 되어서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주님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수시 1차의 좌절을 딛고, 다시 수시2차에 도전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한동대까지 직접 차로 대려다 주셨는대, 그 기회를 통해서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에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오해하고 상처받은 부분이 많았는데 대화를 하면서 그런 부분들이 많이 풀렸던 것 같다. 또 아버지께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 안하시는 분이신대, 그때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시고 시험을 앞두고 긴장된 나에게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나도 마음이 따뜻했다. 시험을 보기 전에 채플로 가서 시험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시험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워진 한동대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본 홍보영상이고, 수십 번도 넘게 들어본 소리였지만 또 다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동대‘에 대한 감동으로 눈물이 나왔다. 드디어 시험은 시작되었고, 나는 첫 번째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사실 이런 경우 굉장히 긴장되어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떠는 것이 정상인데, 나의 마음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시험관 앞에 섰을 때에도 너무나 담담한 내 모습에 나 자신도 놀랐다. 그때 분명히 주님께서 내 맘속에 평강을 주신 것이었다. 이렇게 시험은 30분 만에 끝났고 집으로 가면서 또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가 시험 보러 간 뒤 나도 많이 울었어. 한동대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더라고...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한동대를 크게 쓰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가 한동대에 합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한동대를 위하여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할 것 같아.”수시2차 합격자 발표 날. 한 번의 좌절로 인하여 마음이 불안할 만도 했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너무나 평안하였고, 합격. 이란 것을 알고서 너무나 기뻐서 울음이 나왔다...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한동대에 합격하게 된 것이었다.

B. 치유하심
주님의 은혜로 한동대에 입학 하고나서 너무나도 벅찬 기대감을 품고 한동대에 들어왔다. 다른 학교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감동과 주님의 너무나도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전공 공부도 하고, 동아리활동도 하면서 내 삶속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구체적인 역사하심과 치유하심에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지금 와서 나의 지난 일을 회상하자면, 아픈 기억도 많지만 그런 일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로, 썩어질 세상의 것을 의지하기보다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셨다. 어렸을 적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직접 느끼면서 자라왔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람을 먼저 의지하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깨어버리심으로 결국에는 주님을 의지하게 만드셨다. 그렇게 철저하게 주님만을 의지하게 훈련시키셨으며,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셨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삶을 통해 나를 더 연단하시고 연단하시어 주님나라를 확장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산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지금도 주님께서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나의 가야할 길을 인도하여 주시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두 번째로, 쓸 만한 상처를 선물로 주셨다.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이야기이다.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면 쉽게 상상하기 어렵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내가 보통사람보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값진 경험이다. 다른 사람의 상처에 같이 공감하고 또 내가 극복한 부분에 있어서는 조언 같은 것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했다.

세 번째로, 쉽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주셨다.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하여도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주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해주신다는 사실과, 지금은 힘들어도 분명히 주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좌절’이란 것을 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시련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주님은 ‘평강’이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많은 시련을 주셨으며, 지금 ‘한동대에서의 생활’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연단시키시고 있으시다. 이제는 나에게 올 시련들이 오히려 기대된다. 주님께서 또 어떠한 방법으로 나를 단련시키실지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 나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통째로 바꿔놓으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 너무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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