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젖은 신발을 말리기 위해 사람 몸 하나 들어가면 꽉 차는 화장실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자보다 약간 작은 사이즈의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주에 엄마가 싸주신 카레를 다 먹었던가, 잠깐 생각했다. 한숨을 쉬었다. 어제 새벽에 먹은 라면 그릇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종이 한 뭉치와 노트북이 있었다.
‘죽고 싶다.’
푸른 손잡이의 과도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오른손에 쥐었다. 몇 번 손목으로 휘둘러 보고는, 왼 손목에 갖다 댔다. 닿을까 말까 한 거리, 그 상태로 유심히 핏줄을 관찰했다. 서늘한 날을 느꼈는지, 팔이 움찔 했다.
‘이 걸 자르면 정말 죽을까?’
영화에서 본 것처럼, 붉은 피가 튀며 뿜어져 나오는 것을 상상했다. 소름이 끼쳤다. 칼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손목을 쓰다듬으며 뛰는 맥박을 느꼈다.
9시였다. 학원에 갈 시간이 이미 지났다. 축축한 신발을 들고, 종이 뭉치를 챙기며 생각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 한가.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가?’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계기로 대안 학교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되면서, 나의 삶은 예측된 방향으로부터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만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검정고시를 보기로 했을 때 나는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영어성적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 나에겐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강남에 어느 학원이 토플을 잘 가르친다더라, 그 말 하나만 믿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선릉역 옆 고시원에 자리를 풀고, 기약 없는 토플 성적 올리기에 돌입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덮은 고층건물들이 시야를 가리고, 그 사이로 회색 양복을 입는 직장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거나, 전화 통화를 하거나, 바쁘게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낯설었다. 이 모든 풍경이. 나는 거대한 기계 속에 갇힌 개미였다. 다른 개미들은 바쁘게 자기의 길을 향해 가는데, 나만 갈 바를 알지 못했다. 내가 왜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승리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혐오했다. 테헤란의 거리를, 혐오했다.
고시원에 짐을 풀 때, 눈가를 훔치시던 아버지를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를 한 평 반 남짓 A4노트 만한 창이 있는 고시원에,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두고 내려오시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이해했겠느냐 만은, 그래도 그 인상만은 강렬히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나는 어서 성적을 올려서, 하루라도 빨리 청주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은 예상보다 잔혹했다. 유학 한 번 갔다 온 적 없는 나로서는 애초에 경쟁상대가 되지 않았다. 순수 국내파의 합격 수기를 읽으며,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위안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뛰어넘을 수 없는 그 커다란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내가 들이는 노력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대학입시 라는 장벽이 코 앞에 있었고, 그것이 나를 목 졸라 매듯이 옥죄고 있었다. 2주에 한 번씩 보는 토플성적은 매정하게도 못 박힌 듯 올라가지 않았고, 나 자신은 열등의식에다 늘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 때문에 매일 절망감에 시달렸다.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내 안의 차 오른 우울이었다. 이따금씩 자살충동이 찾아 왔고, 울컥 다 때려부수고 싶은 파괴충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외로움까지 나를 괴롭혔다. 너무 힘들어서, 애꿎은 책상만 두들겼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방, 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맛보았다.
그 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때, 스스로가 너무 무기력해 내 힘으론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그냥 죽고만 싶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 그 걸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엄마를 통해서였다.
엄마가 고시원에 찾아오셨다. 바리바리 맛난 걸 가득 싸가지고 오셨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엄마가 창 밖에 무언가를 보고 계셨다. 그 건 목련나무였다. 하얀 색이었다. 커다란 눈망울로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웠다. 그리고는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밖은 계절이 바뀌고 있었는데 나만 안에서 죽을 둥 살 둥 한 것이 못내 창피했다. 저 목련나무는 그 새 겨울을 나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웠는데, 나만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요상한 힘이 아랫배서부터 솟아올랐다. 이상하게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활력이 생겼다. 한결 싱그러운 마음으로 다시금 그 목련나무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무언가 따스하게 나를 감싸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고 중국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매일 다니던 길에서, 매일 스치던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느 곳에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늘 새 힘과 활력을 주시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배웅하고 난 후, 난 새 삶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어차피 받은 이 인생,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 라고.
상황은 변한 게 없었지만, 마음상태가 달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뀌었다. 예전엔 하루하루가 불안했는데 이젠 편안했다. 토플점수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아도, 견뎌낼 수 있었다. 뭐랄까, 내가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돌이켜보면, 이 때 이 시절을 잘 이겨냈기에 한동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한동을 내게 예비하셨는데, 그 때 힘들다고 다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내 점수로 한국외대를 세 번 지원했는데, 세 번 다 떨어졌다. 처음에 두 번 떨어졌을 땐 앞이 캄캄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그 분의 뜻인 줄 믿고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한동을 지원했을 때는 몰랐다. 한동이 나를 위해 완벽히 예비된 곳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나를 최후의 최후까지 자만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 결과 나는 11월에 수시 어학 특기자 전형에 최종합격을 확인할 때까지 가슴 졸이며 지냈다. 그 때만 해도 중학교 때 갈대상자를 한 번 읽었고, 역시 중학교 때 한동에 견학을 와서 친절한 안내를 받고 갔던 좋은 기억이 있었을 뿐 한동에 대해 잘 몰랐다. 면접을 보러 왔을 때는 너무 긴장을 해서 캠퍼스를 찬찬히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재수하기 싫어서 한동에 억지로 정 붙이려 했다. 그런데 입학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각을 뒤집어지게 하셨다.
나는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들로부터 나의 존재가치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족한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부족한 나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 받을 만하게 창조하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행복 그 자체였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이 광야에 부르시려고 고난과 시련을 주셨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한동에는 하나님의 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눈물이 쌓여가고 있고, 나도 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비록 이 곳에도 힘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단련시키시려고 이 곳에 부르셨음을 고백한다. 혼자일 때도, 내면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았을 때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함께 그 분의 도를 따르게 하셨으니, 이번에도 역시 나와 우리의 삶을 통해 최고의 예물을 드리게 될 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