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08년 7월,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귀를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내 단잠을 방해했다. 벌써 일어나야한다는 실망스러운 마음에 알람을 끄려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7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외숙모에게서 온 전화였다. 내 단잠을 방해한 이 괘씸한 전화기에 짜증을 내며 같이 단칸방에서 주무시던, 벨소리 덕분에 이제는 잠에서 깨신 어머니께 전화를 건네 드렸다. 그리고 이 전화 한 통이 내 삶과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지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2005년도에 아버지와 나를 선봉으로 필리핀에 이민을 갔다. 이 이민은 순전히 내가 다닌 꿈의 학교라는 대안 학교에서 중학교 2학년 때 5개월 캐나다 어학연수를 갔다 온 뒤에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 영어를 더 배우고 싶다'는 나의 지나가는 듯 이야기했던 그 한 마디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북아메리카의 캐나다가 아닌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는지는 순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설명을 해야만 풀리는 미스터리이다. 같은 영어권 국가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그 차이가 심했다. 한 곳은 날씨도 좋고, 자연도 깨끗한 선진국 캐나다이고 다른 한 곳은 개발도상국이라고는 하지만 일 년 열두 달이 계속되는 찌는 듯한 여름이고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거부감부터 드는 필리핀이니 말이다. 여하튼 필리핀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며 영어 실력이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미국으로 대학교 가기를 소망했을 정도니까 나의 영어를 향한 열정과 바람을 들어주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2008년 그 당시에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 대학교를 위한 미국 수학능력평가 시험인 SAT를 공부하러 필리핀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외숙모의 전화를 받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별안간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얼른 텔레비전을 틀어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끼고 잠이 확 깼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리모컨을 찾았다. TV에선 마침 새벽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아마 그 뉴스가 특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뉴스를 방송하기엔 날도 많이 이른데다가, 카메라가 화재로 인해 연기가 자욱한 약간은 낯익은 건물을 잡고 있었고, 상황을 전하던 기자의 목소리도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다급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자는 용인의 어느 고시원에서 불이 나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유독가스로 부상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쓰러지듯 주저앉으셨다. 그리곤 기도하시며 주님을 갈급하게 찾기 시작하셨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건 정말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분명했다. 그 용인의 고시원은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고시원이었다. 온 가족이 전단지를 뿌려가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하고 이제 막 자리 잡은 고시원이었는데 한 만취하신 아저씨의 방화로 불과 몇 십분 만에 손쓸 새 없이 이렇게 큰 인명피해가 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에 SAT 공부도 학원도 뭐도 없이 어머니와 나는 쫓기듯이 필리핀 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영화에서처럼 혹시 공항에서 잡히는 것은 아닌가 마음 졸이며 비행기에 탑승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필리핀에 다시 모인지 정확히 일주일 후에 부모님께서는 남동생과 나를 타지에 남겨놓고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소송이 걸려 부모님께서 인천공항에서 체포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이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부모님께선 담대하게 귀국하실 수 있으셨다. 그리고 당연히 아버지께선 입국하시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셨고 재판과 소송에 휘말리셨다.
우리는 가끔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 그들이 처음에 하나님께 불평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간증들을 들을 때마다 나 같으면 절대로 불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할 거라고 자신했던 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쳐오고 아버지께서 체포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역시 원망과 분노로 하나님께 대들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환난을 우리에게 주시냐고,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러시냐고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원망은 방화범이 잡히지 않자 검찰이 사건은 빨리 종결짓기 위해서 무죄한 아버지를 죄인으로 몰아갔을 때 정점에 달했다. 마침 청소년부의 회장이었고 교회의 엔지니어로 섬기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다 그만두고 싶었다. 교회에 나가기도 싫었고 사람들의 눈초리도 받기 싫었다. 그저 집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동생은 이 어려움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못된' 여자 친구를 사귀고 말았다. 그래서 내 짐은 더욱 더 무거워져만 갔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졌다. SAT도, 미국대학교마저도 내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께서 재판에서 패소하시어 구속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제 정말 끝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흔히, 쉽게 말하는 낭떠러지가 바로 이 곳이었고 이 때였다. 그리고 별안간 이러한 느낌을 언젠가 한 번 더 경험한 적이 있었던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고백하는 것이지만 사실 내겐 어머니 두 분이 계시다. 한 분은 내가 10살 때 암으로 고생하시다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어머니를 잃은 아픔과 충격에 그 어린 나이에 내 삶이 끝이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게 신실하신 어머니 한 분을 더 주셨다. 새 어머니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는 독실한 분이셨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있던 날 위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께로 날 인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지금 내가 하나님 안에서 이렇게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하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어머니 한 분, 땅에서 나를 위해 중보해주시는 어머니 또 한 분, 이렇게 남들과 다르게 두 분의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특권이라고 항상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와 같이 이번 극복하지 못할 벼랑 끝 같은 절망 가운데서도 좋으신 하나님께선 내게 정말 부모님 같은 두 부부를 보내주셨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셔서 필리핀에서 개척 교회를 섬기시는 청소년부 담당 전도사님이셨던 홍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내 부모님이 되어주셨다. 그 분들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열고 내 어려움과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었고 그리고 중보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두 분께서는 그 때는 자녀가 없으셨지만 날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며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해 주시고 항상 힘이 되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분은 교회 권사님 부부셨는데 나와 동생을 위해 마치 부모님처럼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시고 또 기도를 해주셨다. 음식부터 동생과 나의 행동 하나하나 보살펴 주셨고 우리를 아들처럼 뒷바라지 해주셨다. 또 부모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같이 살았던 사촌 형과 사촌 누나의 도움과 응원도 나를 힘들지 않고, 이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지금도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신 이 분들을 생각하면 힘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으신 분이셨다.
그래서 조금씩, 천천히 하나님께 다시 내 상한 마음을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우리 교회가 매주 토요일이 찬양예배로 드려졌는데 예배가 끝나고 개인 기도시간에 기도로 내 아픔을 하나님께 직접 가지고 나갔다.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때로는 울면서 기도했고 때로는 잠잠하게 기도했다. 예배당에서 가장 늦게 나갈 만큼 하나님께 그동안 하고 싶은 말과 회개가 많았나보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무거웠던 내 짐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상처가 깊었는지 회복되는 데에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자신이 회복이 되자 드디어 부모님께 위로와 기도의 편지도 써서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욥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께서 가석방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 동생도 그 여자 친구와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잘 풀리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 대학교에 가려는 나의 소망은 좌절되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만족할 만한 SAT점수와 학점, 그리고 좋은 미국대학교에 반액 장학금을 제안을 받고 합격을 주셨지만 마침 달러 환율이 갑자기 올랐고 또 소송 합의금 때문에 가정 형편이 상당히 어려워져 그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려면 수능은 너무 늦었고 수시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원서를 위해 토익, 토플 등 시험을 보았고 또 다시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주셨지만 수시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불안했던 1차 원서는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합격을 했지만 오히려 비교적 자신이 있었던 면접과 수시 시험을 보는데 모두 보기 좋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분명 경쟁률도 그렇게 높지 않고 내 성적이 낮은 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막으신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모두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안 그래도 돈이 없어서 원서 접수비 내는 것도 힘들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아니하셨다. 재수를 해야 하겠다고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쯤에 마침내 한동대학교에 원서를 내게 되었다. 꿈의 학교에서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학교를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고백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원서를 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접수한 해외학생 전형이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1차에 합격이 되어서 한동대학교에 면접을 보러 갔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그리고 포항에서 산 위에 숨겨진 학교로 어렵게 도착을 했다. 처음에 솔직히 한동을 보고 실망을 했지만 현동홀에서 바로 그 사진을 보고 내 마음을 한동대학교에 빼앗겨버렸다.
하나님께서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비전을 주셨다. 청소년부 수련회에서 한 동영상을 보고 받은 비전인데 특별히 그 동영상의 사진 한 컷이 내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사진은 나사의 위성에서 세계 도시에서 비추는 불빛을 찍은 것이었다. 사진은 점차 확대되어서 많은 나라들을 훑고 지나갔고 그 중에 아시아와 우리나라를 지날 때 순간 북한 평양에서 비추는 한 줄기 옅은 빛이 내 눈과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정말 작은 점에 불과 했지만 내게는 거기에 빠져들 만큼 엄청난 빛줄기로 다가왔다. 수련회 후에 그 빛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누군가로부터 평양 과학기술대학교에 관해 듣게 되었다. 그 때가 또 마침 내가 전공을 기계과로 정한 때여서 그 빛줄기 경험과 평양 과기대와 맞대어 보았을 때 평양 과기대의 교수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사의 세계 불빛 사진이 현동홀에 말 그대로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것을 보고 이 대학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대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접을 마치고 다시 텅 빈 현동홀 정문을 지나면서, 그 나사 사진 앞에서 하나님께 꼭 다시 이곳에 오겠다고 짤막한 기도를 올리고 서울로 올라갔고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높은 경쟁률 속에서도 부족한 나를 불러 다시 이곳 한동에 인도하셨다. 그리고 한동에서 예상치도 못한 꿈의 학교 동창 친구들 포함해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 내 인성을 다듬으시고, 사랑으로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을 통해 지식을 채워주시고, 프레이즈라는 공동체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내 믿음을 단련시키고 계신다.
이렇듯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반 중학교가 아닌 꿈의 학교로 인도하신 것도 한동대학교를 미리 알게 하신 것이고, 캐나다 대신 필리핀으로 인도하신 것도 내게 비전을 주시고 부모님 같은 좋은 분들을 주시려 하신 것이다. 또 원하지 않았던 방화 사건도, 수시의 고배들도 다 하나님께서 한동대학교로 나를 이끄시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확신한다. 또 이번 학기 인성교육에서 읽은 갈대상자를 통해 김영길 총장님의 삶을 읽으며 총장님과 같이 제 3세계에 한동대학교 같은 크리스천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내 두 번째 비전으로 발견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실까? 앞으로 남은 나의 대학 생활과 남은 삶 동안에 더 위대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원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사람들과 나누기를 소망한다.